여성 수학자 올타임? BEST 5
2022.07.04 │ 조회수 : 838
|
여러분 안녕, 배티입니다.
오늘 수업은 <여성 수학자 올타임 BEST 5> 입니다. “대학은 대중 목욕탕이 아니당케” 여교수 임용을 반대하는 꼰대들을 향해 힐베르트가 일침을 날린 것입니다. 100년 전만해도 여자가 수학을 공부한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세상을 바꾼 위대한 여성 수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수업은 레전드 여성수학자 다섯 분의 이야기입니다. 다섯 분을 뽑기도 어려웠지만 이 안에서 순위를 정하긴 더 어려워서, 탄생 순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 히파티아히파티아는 기원후 4~5세기 그리스-헬레니즘 시대가 저물 무렵, 세계 지식의 메카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는 파로스 등대가 불을 밝히고 있었고, 세계 최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서관장이었던 아버지 테온의 든든한 후원으로 아테네에서 유학하였으며, 신플라톤주의 철학, 천문학과 수학을 알렉산드리아에 전파했습니다. 히파티아의 강의는 워낙 유명해서, 이웃 나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으며, 강의실은 항상 만석이 되었습니다. 미모가 출중했던 그녀는 많은 인싸들의 청혼을 받았지만 “저는 진리와 결혼했어요” 라고 철벽을 쳤다고 합니다. 한편, 히파티아가 태어나기 전 알렉산드리아에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391년 기독교가 유일한 국교로 법제화되면서 히파티아 같은 유명학자들은 이교도로 탄압당했으며 마침내 415년 3월 어느 날, 광신도들이 마차로 이동하던 히파티아를 잔인하게 습격합니다. 오직 진리와 결혼했던 히파티아 비뚤어진 신앙은 위대한 지성을 짓밟았습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리스-헬레니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사람보다 신이, 과학보다 종교가 우선시되는 1000년간의 중세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히파티아는 역사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최초의 마녀사냥 희생양이었습니다. - 소피 제르맹
17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소피 제르맹은 재력가의 딸로 태어납니다. 13살이 되던 해,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등 파리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고, 어린 소녀에게 집 밖은 너무 위험했기에 제르맹은 아빠의 서재에서 독서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르맹은 몽튀시아가 쓴 <수학의 역사>를 읽던 중, 아르키메데스가 로마 병사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기하학 문풀에 몰두했다는 사실에 “기하학이 뭐길래, 저 아저씨는 죽는 것도 몰랐을까” 동정심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수학자의 꿈으로 발전했습니다. 한편, 부모님은 제르맹이 상류층 여성의 교양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이 수학, 과학에 몰두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아빠 서재 출입금지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제르맹은 부모님이 잠든 이후, 몰래 초를 켜고 숨겨둔 책을 꺼내, 수학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침, 난리가 났습니다. 제르맹이 수학 공부를 하다 쓰려져 잠들었는데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부모님은 제르맹의 수학 공부를 허락합니다. 제르맹이 18살이 되던 해, 수학을 사랑했던 황제 나폴레옹은 최고의 이과대학 <에콜 폴리테크닉>을 세웁니다. 제르맹은 너무 가고 싶었지만, 에콜은 남학생의 입학만 허락합니다. 제르맹은 강의 노트를 입수해 열심히 공부했고 르 블랑이라는 남학생의 이름으로 과제를 제출합니다. 당시, 에콜의 교수였던 월클 수학자 라그랑주는 “르 블랑이 누꼬? 과제가 완전 창의적이숑” 이라 말하며, 르 블랑을 수소문한 끝에, 여성이라는 걸 알게되고, 제르맹의 집에 방문하여 격찬해 주었습니다. 25세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가우스에게 또 르 블랑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증명을 보여줍니다. “이 놈봐라, 제법인데...” 가우스는 르 블랑이 궁금해졌지만, 수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을 뿐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독일 (구, 프로이센)을 침공하자 제르맹은 아르키메데스의 트라우마가 떠올랐습니다. 가우스가 위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친척이었던 페르네티 장군에게 인류의 보물, 가우스를 지켜달라 간청했으며, 가우스는 르 블랑이 제르맹임을 알게됩니다. 위험을 벗어난가우스는 “제르맹은 숭고한 용기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여성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제르맹은 수학과 과학, 특히 탄성학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로 여성 최초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초청받게 됩니다. 1831년 제르맹은 유방암을 앓기 시작합니다. 가우스는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 괴팅겐에서 제르맹의 명예박사 학위를 추진했는데 아쉽게도 제르맹은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녀의 사후, 괴팅겐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제르맹 소수, 제르맹 정리 등을 세상에 남겼으며 제르맹이 없었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증명이 늦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파리에는 소피 제르맹 거리가 있습니다. 막혀있었던, 여성 수학자의 길을 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소냐 코발레프스키
소냐 코발레프스키(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는 1850년 모스크바의 명문가에서 태어납니다. 소냐가 살던 집은 훗날 학교로 개조되었을 만큼 웅장했습니다. 어린 시절 소냐의 롤모델은 7살 위의 친언니였으며 두 자매는 출중한 미모와 천재성으로 많은 인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학 소녀로 유명했던 언니는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약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10대 후반의 소냐, 조국 러시아를 떠나 가우스가 탄생한 수학 선진국, 독일로의 유학을 결심했지만 유학은 기혼자만 가능했기에, 언니와 묘수를 짜냅니다. 이는 소냐를 짝사랑했던 청년 블라디미르와 위장 결혼을 하는 것이었는데, 결혼 직후, 둘은 독일행 열차에 탑승했으며 1년 후, 컴백한다는 소냐의 약속을 받고, 남편 홀로 러시아로 유턴합니다. 독일에 도착한 21살의 소냐, 해석학의 신 칼 바이어슈트라스를 찾아갑니다. “선생님, 저 수학자로 꼭 성공할테니, 개인 교습 좀요.” 50대의 바이어슈트라스는 당시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일타 수학자였지만, 예쁘고 당찬 소녀의 제안에 바쁜 시간을 쪼개, 무료 과외를 해주었습니다.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바이어슈트라스와 무늬만 유부녀였던 소냐는 평생 정신적(?) 연인으로 애틋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소냐는 24살에 괴팅겐 대학에서 편미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톡홀름 대학교 최초의 여자 수학교수로 발탁됩니다. 38세에는 <고정점에서의 회전>이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학술원 최고 권위의 보르뎅 상을 받는 기염을 토합니다. 하지만, 1891년 41세에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사망합니다. 모두가 사랑했던 소냐, 하지만 평생 진정한 사랑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칼 바이어슈트라스는 그로부터 6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 무늬만 남편, 블라디미르는 찰스 다윈에게 인정받는 유명한 동물학자가 되었지만, 그녀가 떠나기 8년 전 금융 사기에 연루되어 자살했습니다. 소냐가 남긴 대표 명언은 “영혼 속에서 시를 노래하지 않고서는, 수학자가 될 수 없다.” “시인 기질이 없는 수학자는, 진정한 수학자가 아니다.” 칼 바이어슈트라스의 대표 명언과 비슷합니다. - 에미 뇌터 가우스가 활동했던 19세기부터 히틀러가 뻘 짓을 했던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은 독일의 괴팅겐이었습니다. 괴팅겐에는 천문대장 가우스를 필두로, 뫼비우스, 리만, 클라인, 힐베르트 등 월클 수학자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수학계의 리더였던 힐베르트가 뛰어난 여성 수학자 한 명을 영입하려 하자, 교수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대학은 대중 목욕탕이 아니당케” 여교수 임용을 반대하는 꼰대들을 향해 힐베르트가 일침을 날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괴팅겐 최초의 여교수가 탄생합니다. 이 분이 바로, 여성 수학자 원탑으로 꼽힐만한 에미 뇌터 입니다. ![]() 뇌터는 1882년 독일의 에를랑겐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막스뇌터는 에를랑겐 대학 수학교수였으며, 훗날 남동생 프리츠 뇌터도 톰스크 대학 수학교수가 됩니다. 스위스에 수학 명가 베르누이 가문이 있다면 오늘날 뇌터 가문도 수학 명가로 꼽힙니다. 1900년 10대 후반에 수학 교사 자격증을 따지만 그녀의 꿈은 괴팅겐에서 최고의 수학자들과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괴팅겐의 정식 학생은 될 수 없었고 청강생으로 등록하여, 클라인, 민코프스키, 힐베르트... 월클 수학자들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학교 에를랑겐에서 여학생의 문호를 개방하자 정식 학생이 되어, 25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32살에는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의 대타로 강의와 연구를 하며, 추상대수학에 성과를 냈습니다. 1916년 36세의 뇌터는 이를 인정받아 클라인과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최고의 대학, 괴팅겐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후 18년간 괴팅겐에서 명강사 뇌터로 이름을 날렸으며, 현대물리학의 초석 <뇌터 정리>와 <뇌터 링>을 통해, 월클 수학자로 떠올랐습니다. 뇌터는 힐베르트, 헤르만 바일과 함께 추상대수학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남들의 시선이나 외모보다는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여자 아인슈타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뇌터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길을 걷던, 프린스턴 연구소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과로하던 뇌터에게 암이 발병했으며 1935년 53세의 좋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인슈타인은 뉴욕타임지에 이렇게 기고합니다.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뇌터는 가장 창조걱인 수학의 천재였다.” 3대 수학자로 아르키메데스, 뉴턴, 가우스가 꼽힌다면 3대 여성 수학자로는 히파티아, 소냐, 뇌터가 꼽힙니다. - 마리암 미르자하니
마리암 미르자하니는 1977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전기기사의 딸로 태어납니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이란에서 여성이 수학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별을 뛰어넘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란 최초로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여성 대표로 선발됩니다. 1994년, 1995년 연속으로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심지어 95년에는 만점을 받아 세계적인 천재로 급부상합니다. 2004년 27살에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밀레니엄 난제로 유명한 클레이수학연구소와 프린스턴을 거쳐, 31살에 스탠포드 수학과 교수로 수학계의 초엘리트 코스를 밟게 됩니다. 참고로, 스탠포드 출신의 유명 강사 H가 미르자하니 교수의 제자임이 밝혀져,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2014년 서울에서 열린 수학의 올림픽 ICM(국제수학자 대회)에서는 위상 수학의 모듈라 공간에 관한 연구를 인정받아 37세에 여성 최초 필즈메달 수상자가 됩니다. 이는 80년 전(1903년) 마리 퀴리가 여성 최초로 노벨 과학상을 받은 것과 견줄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상식 당시, 유방암을 앓고 있었던 미르자하니 최고의 수학자로 우뚝섰지만, 끝내 암을 이기지 못하고 2017년 40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필즈메달 시상식에서 미르자하니는 “수학은 재능보다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벽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 백의의 천사 백의의 천사하면, 나이팅게일입니다. 크림전쟁이 한참이던 1850년대 중반, 나이팅게일은 야전 병원 간호사였습니다. 당시, 병원의 현실은 열악한 시설과 위생으로 입원한 군인들의 사망률은 무려 42% !!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많았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사망 원인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혁신적인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여 사망률을 42%에서 2%로 낮추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의 탈을 쓴 수학자였으며 여성 수학자 랭킹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베스트파이브와 나이팅게일 외에 월클 여성수학자, 몇 분 더 소개합니다. 마리아 아녜시 1718~1799 이탈리아 구글 로고에 등장했던 마녀 곡선의 주인공 메리 서머빌 1780~1872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10파운드 지폐의 인물 에이다 러브레이스 1815~1852 영국 시인 바이런의 딸이자,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유명한 백작 부인 그레이스 호퍼 1906~1992 미국 프로그래밍 언어 코볼의 어머니 캐서린 존슨 1918~2020 미국 영화 <히든피겨스>의 주인공 NASA의 인간 컴퓨터 캐런 울렌베크 1942~ 미국 2019년 최초의 여성 아벨상 수상자 여성 수학자는 본 영상에 언급된 12분 위주로 공부하시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배티였습니다. BYE~ |